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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파란만장한 역사

우창명 2011.10.01 21:41 조회 수 : 772 추천:23


한글은 태어날 때에도 불쌍했고, 어린 시절도 불쌍했고, 다 자라서도 불쌍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도 계속 불쌍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글은 세종대왕의 어떤 실패한 음운정책의 부산물로 태어났다.
당시 세종의 개인적인 꿈은 한자의 한국식 발음을 모두 중국식 발음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중국의 한족이 몽골족 원나라 지배층을 몽골로 쫓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는데, 명나라에서는 그동안 몽골족에 의하여 망가진 한자 발음을 버리고 한족 고유의 한자 발음을 되찾고자 "운회(韻會)"라는 책과 "홍무정운(洪武正韻)"이라는 책을 펴 낸 바 있다.
세종은 그것이 부러웠고 이 기회에 우리도 모든 한자 발음을 한족의 중국식으로 바꾸어 국제화, 세계화에 앞장서고 싶었다.
그래서 세종은 이 두 책을 우리 말로 번역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한자의 정확한 발음을 표시해 낼 수 있는 발음기호 같은 것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존의 한국식 발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한자만으로는 새로운 발음을 표시해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종이 직접 집현전으로 가서 개인적으로 새로운 발음기호의 제작을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비공식적으로 부탁한 까닭으로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도 안 되어 있다. 당시에 집현전 책임자는 부제학 최만리였다. 대제학으로 정인지가 있었으나 당시 집현전 대제학은 겸직이었고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실제 집현전의 업무는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최만리는 조선에서 가장 존경 받는 선비이자 학자였다. 공직생활 20 여년을 아무 이권도 없는 집현전에서만 근무한 진정한 선비였다. 중간에 사또로 한 번 발령 난 적이 있으나 집현전 일이 많아서 6개월 늦게 부임해서는 6개월 만에 집현전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있다.
당시에 발음기호 즉 한글 개발 작업은 최만리가 추천한 집현전 선비들과 함께 세종 임금님이 직접 참여하였다. 임금님은 글자 개발 작업에 재미가 붙어서 이에 전념하기 위하여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고 발표하여 대부분의 행정업무는 벗어던져 버렸다.
최만리 이하 집현전의 학자들은 세종이 새로운 옥편에 사용할 발음기호를 만드는 좋은 일을 하는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였고, 세종의 속셈이 우리 나라의 한자 발음을 명나라 한족의 중국어 발음으로 바꾸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따라서 집현전 학자들은 임금님의 지휘하에 순조롭게 발음기호를 하나하나 만들어 갔고,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완성이 되었다. 그러나 이 글자 만들기 사업이 독립사업이 아니라 다른 큰 사업의 중간과정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완성돤 정확한 날짜를 기록해 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12월 기록 맨 끝에 나중에 "12월달에..." 라는 정도로 추기해 두었을 뿐이다.
이 때만 해도 이 글자가 얼마나 대단한 글자인지 그 진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최신 기술로 만든 신제품 글자인 줄을 몰랐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이 이후에 새로 만든 글자가 없기 때문에 세종대왕과 최만리 수하들이 만든 이 발음기호 즉 훈민정음 한글이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세계 최신이다.  
그런데 약 한 달 뒤에 세종은 중국식 한자발음 사전에 해당하는 “운회”라는 책의 대대적인 번역사업 계획을 발표한다. 왕세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편찬위원 명단에 올랐다. 운회라는 책이 새로이 간행되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동안에 사용해 오던 모든 한자 발음을 버리고 중국 한족의 발음으로 일제히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자를 주로 사용하는 양반층에서는 거대한 혁명과 같은 엄청난 대사건이었다.
여기에 최만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집현전 학자들이 발끈하였다. 오랫 동안 써 오던 우리 나라식 한자 발음을 버리고 갑자기 왜 중국식 발음으로 바꾸느냐 하는 것이 불만의 요지였다. 당시 집현전 학자의 상당수가 세종의 새로운 음운정책에 반대하였고 세종에게 정식으로 상소문을 올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상소문을 써서는 최만리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려 놓았다. 이걸 보고 이번에는 세종이 발끈하였다. 그렇게 믿었던 최만리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당장 그 일당을 잡아서 가두라 하였다. 그 때가 저녁 나절이었다.
세종이 최만리를 불러서 직접 하문한 내용은 바로 이 한 마디였다.
"운(韻)에 대해서 뭘 아시오?"
<<중국어에서 운이란 발음에서 모음부분 이하를 말하는 것으로(산, 간, 만 발음에서의 [an] 발음) 한시를 쓸 때에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며, 중국 본토 발음인가 사투리 발음인가 하는 것을 가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종은 이 기회에 정말 한자 문화권의 후진성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고, 최만리는 갑작스러운 발음 변동에 대한 대규모 혼란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최만리는 "지금까지 힘들게 만들었던 그 발음기호들이 겨우 이런 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인가" 하면서 홧김에 발음기호(한글)에 대한 비판도 몇 마디 곁들였다.
그런데 500년이나 지난 뒤에서야 이게 문제가 되어 최만리가 한글창제 반대의 선봉에 섰다느니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글 창제과정에서는 아무도 반대한 사람이 없었으며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위 상소문은 한글 창제 한참 뒤에 나온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세종은 사무실에서 투덜투덜 밤을 새웠고, 최만리, 신석조, 정창손, 하위지 등 집현전 학자들은 의금부 감옥에서 투덜투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세종은 이들을 거의 다 석방하였다. 대학자들을 마냥 가두어 둘 수는 없었다.
<<여기서의 하위지는 나중에 사육신의 한 명이 된다. 정창손만을 파직시킨 것은 이 상소문의 실제 집필자가 정창손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창손은 나중에 영의정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는 대정치가가 된다.>>
그러나 최만리는 단단히 화가 났다.
"당신 같은 임금과는 일 못하겠소"
사표를 내고는 출근도 안 하고 집에 콕 박혀서는 아프다면서 생전 나오지도 않았다. 세종은 다급해졌다.
"집현전 부제학 자리는 항상 비어 있소. 언제든지 나오고 싶을 때에 나와 주시오"
최만리는 끝내 안 나왔고, 그로부터 1년 반인가 뒤에 세상을 뜬다.
최만리 등 집현전 학자들이 반대했던 운회언해라는 책자는 결국 간행을 못하였다.
그래서 한자의 발음은 그냥 우리나라 식으로 살아 남았다.
최만리는 집현전 장기근속자답게 엄청 가난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더 존경했다.
세종조 청백리가 모두 15명인데 최만리가 서열 두 번째로 올라 있다.
세종 시절 청백리의 첫째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한성부윤 "정 척"이라는 분이었고
최만리 다음 서열로 청백리에 오른 분은 그 유명한 "황 희" 정승이다.
청백리에 오른 최만리는 역대 왕들의 위패가 있는 종묘에서 아직도 세종과 함께 모셔지고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 김윤경이라는 한글학자의 한번 실수로 "최만리는 한글 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주모자"로 오인되고 있다. 그 한글 학자는 일제시대의 일본학자 "고쿠라 진페이"가 쓴 논문의 일부를 확대 해석하여 최만리를 엄청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최만리에 대한 상세한 논문은 이미 1950년대에 이숭녕 박사에 의해서 두 편인가 발표된 것이 있다.  
최만리는 억울하다. 최만리 후손 해주 최씨 문중에서 최근에 복권운동을 하고 있으나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주는 일이라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아 아직 획기적인 성과는 없는 모양이다.  
기존의 선입관들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여 아직도 많은 국사 책에서 한글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빠른 시일 내에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현재 가장 시급한 일은 최만리라는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비판하고 있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부터 빨리 고치는 일이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나쁜 최만리"가 들어갈 뻔 하였으나 마침 그 때 필자가 교과서심의위원으로 있던 때여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다행히 뺄 수 있었다.
세종의 소원이었던 한자발음의 중국화 정책은 최만리를 숭배하는 많은 선비들의 외면으로 실패로 끝났다. 세종의 정책이 성공했더라면 지금 우리나라의 한자발음이 중국어의 한자발음과 같아졌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어의 정확한 발음을 귀로 확인하기 위하여 요동으로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족 출신 황찬이라는 무관을 만나려고 요동으로 열 몇 번이나 출장 갔다 온 신숙주와 성삼문만 엄청 고생했다.(이들의 출장 목적은 정확한 한족의 중국어 한자발음을 듣기 위한 것이었다)
어찌 되었거나 세종으로서는 애써 만든 발음기호까지 버리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어린 백성이... " 어쩌고 하는 서문을 붙여서 백성용 글자로 반포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최만리 사후 1년 반 뒤의 일이었다. 이 글자들의 명칭은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훈민정음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훈민정음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우리나라는 세계최고 수준의 문맹국가에서 탈피하여 거의 전 국민이 글자를 해독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 버린다.
고려시대 광종이 과거제도를 도입한 이래 한없이 문맹률이 올라가서 문자 해독에 대한 백성들의 갈증이 단숨에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과거시험이 출제되는 책의 제목(이를 "과목"이라고 한다)들이 모두 한문으로 된 중국 책이라 과거를 위해서는 한문을 알아야 했다. 한문 하는 사람 앞에서는 간단한 한자 몇 자만 알면 의사소통할 수 있는 이두가 그저 창피할 뿐이었다. 따라서 이두는 창피해서 안 쓰고 한문은 어려워서 안 쓰고... 이래저래 글자알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었다>>
한글은 사나흘이면 누구나 읽고 쓰고 할 수 있으니 지구상에 그런 글자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여자들은 물론이고 평민, 천민들까지도 문자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한글은 수천 년 전에 만든 지구상의 어떤 구식 글자와도 비교가 안 된다. 자타가 공인하는 전세계의 최신형 글자가 바로 우리 나라 한글이다.
그러나 너무 쉽게 만든 것도 탈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수치로 생각하였고 모든 국가의 공식장부에서 철저히 외면 당하였다. 그래서 서민들과 여자들 사이에서만 비공식적으로 전승되는 글자가 되고 말았다.
한글은 연산군의 모친 윤비가 죽는 데에 크게 공헌을 세웠다고 하여 효자 연산군에 의하여 크게 낭패를 본 적도 있다.
어쨌든 조선 시대의 공식 문자는 여전히 한자로만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글이 우리 나라의 공식적인 글자로 승격되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글을 우리 나라의 공식 글자로 승격시키는 데에는 1890년대에 일본의 힘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었다.
일본이 우리 한글의 우수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에 그리 해 준 것은 아니고, 우리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 중국과 떼어 놓겠다는 전략적 필요성이 그 이유였고, 한글을 주로 사용하는 서민들의 힘을 강화시켜 기존 우리 양반들의 발언권을 축소시켜 놓자는 것이 또다른 이유였다.
물론 그 전에 신부나 목사들이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평등과 자유"라는 무기를 들고 우리 나라 서민들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하여 서민들의 글자인 한글을 사용한 성경을 보급한 것도 때늦은 한글 발전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한글 성경 때문에 우리 나라의 민심이 적지 않게 흔들렸고 그 빈틈을 일본이 적절히 잘 활용한 셈이었다. 이 때 일본이 조금만 더 약하게 나왔다면 우리 나라도 저 동남아나 아프리카처럼 유럽이나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성경과 대포를 앞세우고 수많은 나라를 유린했던 서구 열강들은 죽 쑤어서 개 준 꼴이 되어 버렸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 나라를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으로 독립시켜 주고 아울러 독립협회도 만들어 주고 독립문도 세우게 하고 독립신문도 창간되게 하여 신문사 윤전기용 한글 활자를 무제한 제작하여 우리 나라에 보급하였다.
<<당시 "독립"의 개념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우리도 황제의 나라이다"라는 개념이었다. 일본은 이 때에 우리 나라에 심어 준 "독립정신" 때문에 나중에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덕분에 우리 나라는 갑자기 한글시대로 급속하게 변해 갔다. 일본이 들어와서 양반계급도 없애 주고, 한글만 가지고도 살 수 있게 해 주었으니 중인 이하 서민층에서는 정말로 신나는 세상이었다. 한글 창제 450년만에 맞이한 때늦은 한글시대의 새로운 주인공은 최남선, 이광수 등 중인계급의 후예들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1940년대 초에 내선일체인지 뭔지 때문에 3, 4년간 한글을 안 써도 되게 해 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 앞으로 조선 사람들을 절대로 차별대우하지 않겠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어도 좋고, 국어도 일본어로 통일해 주겠다. 그러니까 완전히 일본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 주겠다는 말이다. 어때? 좋지? 근데말이야... 이제 완전히 일본 사람 되었으니 너희 청년들 우리 일본 군대에 좀 보내 줄래?... 라는 속셈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러다가 일본이 전쟁의 패배로 자기 나라로 얼른 돌아가 버리고 우리 나라에는 일본이 부활시켜 준 한글사용 습관과 수많은 한글 활자만 남게 되었다.
한글을 500년만에 부활시켜 준 일본의 검은 속셈이야 괘씸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한글사용습관이 단기간에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일본의 도움이 컸다고 아니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최신식 모드로 만든 한글 글자의 우수성이 뒤늦게 인정받아 전세계 언어학자들 회의에서 신생국의 글자로 가장 적합한 글자로 “한글”이 선정되었으며, 현재 인도네시아의 한 지방에서 한글을 수입하여 현재 사용중에 있고, 볼리비아의 한 지방에서도 현재 시범운영 중에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상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보면
한글은 세종의 잘못된 한자발음 수정정책의 부산물로 태어났고, 최만리는 억울하며,
일본의 침략준비 수순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공식적인 글자로 재탄생하였으나.
그 품질은 가장 최근 모드로 만든 것이니만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할 수 밖에 없다...
대강 이 정도로 정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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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란만장한 한글의 역사를 위로도 해 줄 겸
자타가 공인하는 최신식 모드의 우수한 글자라는 것을 자랑도 할 겸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 재순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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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구요?
미국이 영어 글자 만든 날 안 놀아서 우리도 놀면 안 된다구요?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아이들에게 한글보다 영어를 먼저 가르칠 예정이라고요?
음..
한글은 글자 이름이고, 영어는 나랏말 이름인데, 좀 똑바로 말하세요
“한글보다 로마자”라든지, “국어보다 영어”라든지 말해야 되거든요.
우리말도 제대로 모르면서 영어는 무슨.....
하여튼 잘 먹고 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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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문학박사 황재순(부개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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